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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핀 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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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라핀 루이는 1864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화가로, 가정부로 일하며 그림을 그렸다. 1912년 독일 미술 수집가 빌헬름 우데에 의해 작품이 발견되었고, 그의 후원을 받아 나이브 미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1929년 우데는 루이의 작품 전시회를 열었지만, 대공황으로 후원이 끊겼다. 1932년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1942년 사망했다. 루이의 작품은 생전에 재평가받았으며, 영화로 제작되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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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핀 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세라핀 드 상리스 (잘린 이미지)
아틀리에의 세라핀 루이
본명세라핀 루이
다른 이름세라핀 드 상리스
국적프랑스
출생1864년 9월 3일, 아르시
사망1942년 12월 11일, 빌레르-수-에르케리
예술 활동
분야회화
사조아웃사이더 아트
스승독학
후원자빌헬름 우데
관련 인물
관련 인물빌헬름 우데
관련 인물프랑수아즈 클로아렉
관련 인물마르탱 프로보스트

2. 생애

세라핀 루이는 1864년 9월 3일 우아즈주 아르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육체 노동자와 농가 출신이었다. 루이는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재혼한 아버지마저 7세 이전에 잃었다. 이후 맏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양치기로 일하다가, 1881년부터 클레르몽의 프로비던스 수녀회 수녀원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1901년부터는 생리스에서 가정부로 일했다.[7][8][9][10]

1881년, 18세의 나이로 수녀원에서 20년간 일했으며, 1901년에 수녀원을 나와 가정부로 일했다. 40세가 넘어 수호 천사의 계시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7] 1912년 독일 미술 수집가 빌헬름 우데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루이는 힘든 일과중에 틈틈이 촛불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다.[3]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우데는 프랑스를 떠났고,[13] 세라핀은 독일군 점령하의 상리스에 남아 마을이 폭격당하는 것을 목격했다.[10]

1932년, 루이는 만성 정신병으로 클레르몽의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예술 활동을 하지 못했다. 우데는 그녀가 1934년에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5] 실제로는 1942년 빌리에르-수-에르케리의 병원 부속 건물에서 외롭게 죽었고, 공동 묘지에 묻혔다.[4]

2. 1. 배경

세라핀 루이는 1864년 9월 3일 우아즈주의 작은 마을 아르시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체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농가 출신이었다. 루이의 어머니는 그녀의 첫 생일에 사망했고, 재혼한 아버지 또한 그녀가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맏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양치기로 일했지만, 1881년까지 클레르몽에 있는 프로비던스 수녀회 수녀원에서 가정부로 고용되었다. 1901년부터는 생리스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가정부로 고용되었다.[7][8][9][10]

2. 2. 수녀원 생활

1881년, 18세의 나이로 크뤼니 성 요한 수도원에 들어가 잡역부로 20년간 일하게 되었다. 세라핀은 이 수도원 생활을 통해 신앙심,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경심을 깊이 했다고 전해진다.[11]

2. 3. 가정부와 화가

1901년에 수녀원을 나와 콩피에뉴와 쥐스탱-쇼세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1904년에는 상리스로 이주하여 파리 가 10번지에 있는 무이 가의 하숙 가정부가 되었다[10]。 1906년, 퓌-티페느 가 1번지에 아파트를 빌려 혼자 살면서 출퇴근하며 일했다. 40세가 넘어서 수호 천사의 계시를 받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7]。 처음에는 가구나 접시, 판지나 판자에 그림을 그렸고, 이윽고 작은 캔버스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림은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거나, 식량과 교환했다[10]。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작은 성모 마리아상 앞에서 램프를 켜고 그림을 그렸다. 그녀는 "이런 모든 일(그림을 그리는 것)을 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서다. 나는 주로 밤에 그림을 그린다. 거리가 잠들었을 때. 나의 정물화는 선한 신과 성모에게 드리는 선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천국에 갈 것이다. 태양은 신이다. 그리고 그것은 천국의 열매다. 나에게는 천국이 이렇게 보인다"라고 말했다[12]。 화구를 살 여유가 없었던 그녀는 물감도 돼지 피나 양초의 밀랍, 성유 등을 사용하여 모두 직접 조제했다. 유일하게 흰색만은 근처 약국, 잡화점에서 리포랑 사 제품의 광택 있는 페인트를 샀다[11]

힘든 일 외에도 루이는 1912년 독일 미술 수집가 빌헬름 우데에 의해 상당한 양의 작품이 발견될 때까지 주로 비밀스러운 고립 속에서 촛불을 켜고 그림을 그렸다.[3] 센리스에서 우데는 이웃집에서 사과 정물을 보고 루이가 자신의 하녀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4] 그의 후원은 그녀의 시야를 넓히기 시작했지만, 1914년 8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은 그녀의 기이한 성격 때문에 루이와 마찬가지로 그를 센리스에서 달갑지 않은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1927년에 우데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샹티이에 살면서 센리스에서 열린 지역 예술가 전시회를 방문하여 루이의 작품을 보고 그녀가 살아남았고 그녀의 예술이 번성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재회했다. 우데의 후원 아래 루이는 2미터 높이의 대형 캔버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당대 나이브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1929년 우데는 루이의 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성심 화가" 전시회를 조직하여 그녀를 그녀가 알지 못했던 재정적 성공의 시기로 이끌었지만, 그녀는 이를 관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1930년, 대공황의 영향으로 그녀의 후원자들의 재정이 파탄나면서 우데는 그녀의 그림을 사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 4. 빌헬름 우데와의 만남

루이는 1912년 독일 미술 수집가 빌헬름 우데에 의해 그림이 발견될 때까지 주로 비밀스러운 고립 속에서 촛불을 켜고 그림을 그렸다.[3] 센리스에서 우데는 이웃집에서 사과 정물을 보고 루이가 자신의 하녀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4]

1907년, 휴가차 상리스에 머물던 독일인 미술 평론가이자 미술품 수집가 겸 화상인 빌헬름 우데가 무이 가에서 우연히 세라핀의 그림을 발견했다. 그 강렬함에 매료된 그는 화가의 이름을 묻자 "가정부가 그린 그림"이라는 답을 듣고 즉시 세라핀을 만나 이 그림을 포함한 여러 점의 그림을 사들였다. 우데는 처음 그림을 봤을 때 "세잔에게 보여주면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 정물화들은 비범한 정념, 신성한 열정, 중세적인 격정이 혈육화된 것이다"라고 적었다.[13]

우데는 결코 부유하지 않았다. 독일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아버지에게 가업을 잇도록 권유받았지만 예술을 지향하여 1904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파블로 피카소조르주 브라크 등 젊은 화가들이 아직 보헤미안으로 몽마르뜨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1907년, 피카소는 몽마르뜨의 카바레 "오 라팡 아질"에서 우데를 만나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여주었다. 우데는 이를 계기로 당시 아직 무명이었던 그들의 그림을 사들여 소개했다. 앙리 루소 역시 이러한 화가 중 한 명이었으며, 1908년 우데가 파리에서 처음 연 전시회에서는 피카소, 브라크, 루소의 작품을 전시했다.[14] 우데는 특히 소박파 화가들을 발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에 루소, 루이 비방, 앙드레 보샹, Camille Bombois|카미유 붐부아프랑스어, 세라핀 루이의 생애와 작품을 소개하는 『5인의 소박파 거장 (''Cinq maîtres primitifs'')』(1947)을 저술했다.

1912년, 우데는 여동생 안느 마리 우데와 함께 상리스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이때, 세라핀을 가정부로 고용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녀가 마음껏 그림을 그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화구 등을 제공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이 무렵, 그녀의 기행 - 검은 옷차림, 페티코트 겹쳐 입기나 숄을 여러 겹 걸치기, 물감을 칠한 캉캉 모자, 기묘한 물건들을 잔뜩 채운 바구니 등 - 은 누구의 눈에도 띄었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2]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인인 우데는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세라핀의 그림을 포함한 컬렉션은 몰수되었고, 1921년에 경매에 부쳐졌다. 우데는 나중에 구매자를 찾았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13] 세라핀은 독일군의 점령 중에도 상리스에서 살면서 마을이 폭격을 받는 것을 목격했다.[10]

우데의 후원은 그녀의 시야를 넓히기 시작했지만, 1914년 8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은 그녀의 기이한 성격 때문에 루이와 마찬가지로 그를 센리스에서 달갑지 않은 외부인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1927년에 우데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샹티이에 살면서 센리스에서 열린 지역 예술가 전시회를 방문하여 루이의 작품을 보고 그녀가 살아남았고 그녀의 예술이 번성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재회했다. 우데의 후원 아래 루이는 2미터 높이의 대형 캔버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당대 나이브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1929년 우데는 루이의 작품을 특징으로 하는 "성심 화가" 전시회를 조직하여 그녀를 그녀가 알지 못했던 재정적 성공의 시기로 이끌었지만, 그녀는 이를 관리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1930년, 대공황의 영향으로 그녀의 후원자들의 재정이 파탄나면서 우데는 그녀의 그림을 사는 것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2. 5.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인이었던 빌헬름 우데는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13] 세라핀의 그림을 포함한 우데의 컬렉션은 몰수되어 1921년에 경매에 부쳐졌다.[13] 세라핀은 독일군 점령 중에도 상리스에 남아 마을이 폭격당하는 것을 목격했다.[10]

전쟁이 끝난 후, 세라핀은 더욱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고, 대형 캔버스를 사용하여 과일, 나무, 꽃(특히 마거리트) 등을 연달아 제작했다. 1927년 10월, 예술우호회의 권유로 상리스 시청에서 열린 전람회에 『앵두나무』, 『검은 배경의 라일락 꽃다발』, 『두 그루의 포도나무』 3점을 출품했다. 마침 샹티이에 머무르고 있던 우데는 전람회를 방문하여 세라핀의 그림과 재회하고, 더욱 격렬하고 빛과 색채로 가득 찬 그림에 감동하여 3점 모두 구입했다.[13]

우데는 세라핀에게 다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며 파리에서 그녀의 그림을 소개했다. 1928년에는 "신성한 마음의 화가"라는 제목으로 세라핀, 루이 비방, 붐부아, 앙드레 보샹 등 소박파 화가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를 개최했다. 세라핀은 파리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상리스에서는 여전히 기인 취급을 받았다. 지역 신문은 세라핀을 "상리스의 앙리 루소"라고 칭찬하면서도, 그녀가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없다는 점을 비꼬기도 했다.[7]

세라핀은 우데의 경제적 지원으로 금도금 접시, 정교한 장식이 된 액자, 천사상, 은식기 등 값비싼 물건들을 사들였지만,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우데는 더 이상 그녀의 그림을 구매하기 어려워졌다.[13]

2. 6. 정신 질환과 죽음

1932년, 루이는 만성 정신병으로 클레르몽의 정신 병원에 입원했으며, 그곳에서는 그녀의 예술성이 발휘되지 못했다. 우데는 그녀가 1934년에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5] 일부에서는 루이가 실제로 빌리에르-수-에르케리의 병원 부속 건물에서 1942년까지 살았으며, 그곳에서 친구도 없이 외롭게 죽었다고 한다.[4] 그녀는 공동 묘지에 묻혔다.

1931년 1월, 불안과 피해망상에 시달리던 세라핀은 갑자기 정신착란에 빠져 짐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에게나 고함을 질렀다. 헌병대에 붙잡혀 급히 입원했다. 2월 25일에는 클레르몽-드-로아즈 정신병원으로 옮겨졌고, 이후 에르케리의 별동으로 이송되었다. 이후 망상에 사로잡혀 많은 편지를 썼지만,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않았고, 이윽고 무감동증에 빠져 1942년 12월 11일에 사망했다. 사인은 굶어 죽음으로 알려졌다[8].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클레르몽 묘지의 "합장묘"에 매장되었다[16]

그녀는 생전에 생리스 대성당에서 웅장한 장례식을 치르고, 고향 알시의 묘지에 매장되며, 묘비에는 "무적의 세라핀 루이 마이야르, 여기에 잠들다. 행복한 부활을 기다리며"라고 새겨지기를 바랐다. 현재, 생리스 묘지의 "추억의 정원"에 이 문구를 새긴 명판이 놓여 있다.[9]

3. 작품 세계

루이의 작품은 주로 풍성하고 반복적이며 장식적인 꽃꽂이의 환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내구성과 생생함을 지닌, 흔치 않고 이국적인 재료로 직접 만든 색상과 안료를 사용했으며, 그 재료는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그림 표면은 매트하고 거의 왁스 같은 느낌을 준다. 때때로 그녀의 서명(일반적으로 "S. Louis")은 칼로 새겨져 대조적인 색상의 바탕을 드러내는데, 어떤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서명한 것으로 보인다.[3]

''생명의 나무'' (''L'arbre de vie''), 1928년


루이는 억누를 수 없는 창작 욕구에 사로잡힌 예술가였다. 2008년 10월 1일부터 2009년 5월 18일까지 파리의 마이욜 미술관에서 열린 "세라핀 루이 디트 세라핀 드 센리스" 전시회 서문에서 마이욜 미술관 큐레이터인 베르트랑 로르캥은 "칸딘스키가 말한 이 유명한 내적 필연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3. 1. 우데의 평가

빌헬름 우데는 세라핀의 그림이 종교적인 황홀경 상태를 표현하며, 색채가 풍부하고 빛으로 가득 찬 그림은 신에 대한 "타오르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회화 구성의 "균형, 조화, 공간 배분의 문제를 모두 단번에 해결해 버릴 정도로 강력한 지성"이 있으며, "내적 위기의 고조와 함께 공간 구성이 복잡해졌다"라고 지적했다.[13]

4. 재평가와 영향

빌헬름 우데는 세라핀 루이를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지원했지만, 1930년대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경제적 지원이 끊기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우데는 세라핀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여 파리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었지만, 세라핀은 고향 상리스에서 기인 취급을 받았다. 지역 신문은 그녀를 "상리스의 앙리 루소"라고 칭찬하면서도, 그림 공부를 한 적이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비꼬았다.[7] 세라핀은 주변 사람들의 모욕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4. 1. 사후 재평가

빌헬름 우데는 1932년 파리에서 열린 "현대 원시주의자" 전시회를 시작으로, 1937년부터 1938년까지 파리, 취리히, 뉴욕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현실의 대중적 거장" 전시회, 1942년 파리에서 열린 "20세기 원시주의자" 전시회에 이르기까지 세라핀 루이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전시했다. 1945년에는 파리에서 그녀의 개인전을 열었다.[6]

루이의 그림은 센리스의 미술관, 니스의 생경 미술관, 빌뇌브 다스크의 릴 메트로폴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2009년,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의 프랑스 전기 영화 ''세라핀''은 작품상과 타이틀 롤을 연기한 욜랑드 모로의 여우주연상을 포함하여 7개의 세자르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1912년 루이와 빌헬름 우데의 첫 만남부터 클레르몽 정신병원에서의 그녀의 시절까지의 관계를 탐구한다.[6]

마르그리트 뒤라스생텍쥐페리의 전기로 알려진 작가 알랭 비르콩들레는 1986년에 이미 세라핀의 전기를 저술했지만, 세라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그가 다음 작품 《세라핀 - 그림에서 광기로》를 발표한 2008년이었다. 같은 해에 작가 프랑수아즈 크로알렉이 《세라핀 - 상리스의 세라핀이 꿈꾼 인생》(번역서 《세라핀》, 야마가타 아즈사 역, 미지계, 2010)을 발표했고,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이 이를 바탕으로 동명의 영화(한국 제목은 《세라핀의 정원》)를 제작했다. 특히 세라핀을 연기한 욜랜드 모로의 강렬한 연기, "마치 화가 세라핀이 빙의된 듯한" 연기[17]에 그림의 강렬함이 더해져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재평가받게 되었다. 같은 해 파리의 마이욜 미술관에서 사후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18]

5. 작품 소장 미술관

세라핀 루이의 작품은 마이요르 미술관 외에도, 릴-빌뇌브 다스크 현대 아웃사이더 아트 미술관, 그르노블 미술관, 라발 소박파 미술관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17]


  • 생리스 예술·고고학 박물관은 우데의 여동생 안느-마리에게 기증받은 작품, 과거 "우데 전시실"이 있었던 국립 근대 미술관에서 기탁받은 작품(『붉은 나무』, 『포도송이』, 『천국의 나무』, 『녹색 배경의 석류』), 생리스 시가 구입한 작품을 포함한 1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11]
  • 라발 소박파 미술관은 『미모사 꽃다발』, 『과실 가지』 2점을 소장하고 있다.[19]
  • 릴-빌뇌브 다스크 현대 아웃사이더 아트 미술관은 『꽃다발』 등을 소장하고 있다.
  • 마이요르 미술관은 『꽃과 과일』, 『붉은 배경의 꽃다발』, 『잎, 꽃, 과일 묶음』, 『잎이 달린 사과』, 『잎 묶음』 등을 소장하고 있다.[20]

참조

[1] 뉴스 In Senlis, Seraphine, the Outsider Art flower https://www.liberati[...] Liberation 2015-01-23
[2] 뉴스 In Senlis, Seraphine, the Outsider Art flower https://www.liberati[...] Liberation 2015-01-23
[3] 서적 Painting and Sculpture in Europe 1880–1940 https://archive.org/[...] Yale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Obstacle Race: The Fortunes of Women Painters and Their Work Tauris Parke Paperbacks
[5] 웹사이트 1945 exhibition poster https://www.flickr.c[...]
[6] 웹사이트 Séraphine review https://www.rogerebe[...] Roger Ebert, SunTimes 2011-07-27
[7] 웹사이트 SÉRAPHINE de SENLIS: Un génie singulier https://mariejobon.n[...] 2019-03-04
[8] 웹사이트 Séraphine de Senlis enfin réhabilitée http://www.lefigaro.[...] 2019-03-04
[9] 웹사이트 Séraphine LOUIS (1864-1942) - artiste peintre http://www.chi-clerm[...] 2019-03-04
[10] 웹사이트 Séraphine Louis dite Séraphine de Senlis. : biographie, actualités et émissions France Culture https://www.francecu[...] 2019-03-04
[11] 웹사이트 Séraphine Louis dite Séraphine de Senlis http://musees.ville-[...] 2019-03-04
[12] 서적 Dictionnaire amoureux du Nord Plon 2019-03-04
[13] 서적 Séraphine de Senlis Gallimard/Fondation Dina Vierny-Musée Maillol 2019-03-04
[14] 서적 Séraphine de Senlis Gallimard/Fondation Dina Vierny-Musée Maillol 2019-03-04
[15] 웹사이트 Séraphine Louis: l'ange au plumeau https://www.lexpress[...] 2019-03-04
[16] 문서 共同墓穴
[17] 웹사이트 「セラフィーヌの庭」 http://www.mmm-ginza[...] 2019-03-04
[18] 웹사이트 Séraphine, c’est un film, mais aussi une expo à Paris https://www.telerama[...] 2019-03-04
[19] 웹사이트 La Mayenne - Musée d'art naïf de Laval http://www.mayenne-t[...] 2019-03-04
[20] 서적 Séraphine de Senlis Gallimard/Fondation Dina Vierny-Musée Maillol 2019-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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